때가 되면 다 죽어요. 그러니 하루하루 즐겁게 잘 살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다 죽어요. 법정 스님의 생전에 하셨던 법문을 정리해 보는 포스팅을 해보려고 합니다. 총 2회 분량의 법문입니다. 

때가 되면 다 죽어요. 법정 스님 설법 하시는 모습

나무마다 꽃과 새 잎을 펼쳐내는 이런 봄날.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어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생애의 한 순간을 어 우리는 이와 같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 제가 오늘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1년에 한두 차례 씩 어떤 날이 있어 가지고 이 모여서 얘기한다는 건 이건 결코 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여기 나오실 때 큰 마음 먹고. 뭐 다른 바쁜 일도 집안에 있을텐데.

뭐처럼 또 일요일 날 가족들과 쉴 텐데. 

이렇게 마음 먹고 나오시고.

저도 이제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렇게 이제 나오고 한다는 것은 우리 이런 만남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서 말을 해야 하고 듣는 쪽에서도 진심으로 기운을 귀를 기울여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의 정신 세계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흔히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끼리도 상대방의 말에 진심으로 몰입하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귓등으로 넘기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관계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서로가 영혼의 메아리를 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기가 바로 21세기입니다.

20세기와 크게 이제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도 하나가 이제 정보 매체에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인터넷이 활개를 치는 그런 세상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무엇엔가 누군가와 접속을 하지 않으면 사람 축에 못 드는 그런 세태에요.

20세기와 크게 다른 점이 그렇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한 사람들은 두 사람끼리 혹은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각자의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이때 감정을 교환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한 간접적인 접속이지 직접적인 접촉은 아닙니다.

간접적인 접속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이고 한편 또 이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이 오고 갈 수 없어요.

한마디로 비 인간적입니다.

가끔 외국에 나가 계신 친지들로부터 뭐 인터넷을 통해서 제 소식을 듣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약간 씁쓸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접속과 접촉의 차이

접속과 접촉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뜻은 전혀 다릅니다.

접속은 간접적이고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접촉은 직접적이고 상호 간의 만남이에요.

우리는 지금이 자리에서 접속이 아닌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고 눈길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함께 누립니다.

때로는 손을 마주 잡거나 미소를 짓거나 쓰다듬는 접촉을 통해서 인간의 정이 오고 갑니다.

이와 같이 접촉은 인간적입니다.

컴퓨터의 사각 스크린 앞에서 주고받는 정보는 이 시대의 편리한 수단입니다. 분명히 편리한 수단이에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디찬 기계 장치이지 살아서 숨 쉬는 따스한 생명체는 아닙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 보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휴대전화와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우리 곁에서 어 사라진다고 한번 가정해 보세요.

아마 큰 난리가 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살 맛을 잃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특히 하루에도 수십통씩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그 문자 메시지에 매달려 사는 어 젊은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 입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와 테레비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을 누리면서 살 줄 알았습니다.

지능적인 사기꾼도 덜 걱정스러웠어요.

신속하고 편리한 정보 매체를 곁에 두고 사는 요즘에 우리들은 어째서 그전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렇게 편리한 정보 수단을 가지고 살았는데 왜 그 전보다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없냐 이겁니다.

세상은 더 살벌해지고 더 극악해지고 사람들은 더 왜소해 집니다.

 

과다한 정보는 공해

과다한 정보는 분명이 공해입니다 과다한 정보 지나친 정보는 공해.

왜냐하면은 정보가 사람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데이터 스모그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데이터 스모그 과도한 정보원이 하나 하나 오염. 스모그라는 거예요.

매연이라는 거예요. 공해라는 겁니다.

인터넷으로 접속이 안 되거나 해커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때 마치 세상이 뭐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그렇게 야단스럽지 않습니까?

어쩔 바를 모른다고.

왜냐하면은 이런 그 연장의 길이 들었기 때문에 뭐든지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그래요.

뭐든 즉석에서 끝장을 내려고 한다고.

참고 기다릴 줄을 몰라요.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인간의 덕입니다.

근데 이렇게 신속하고 편리한 기계 장치에 의존하면 살다 보니까 뭐든지 즉석에서 해답을 끝내려고 해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살율이 높은 것도 그 것 입니다.

그건 한때의 어떤 고비인데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뛰어내리지 않습니까?

참고 기다릴 줄 몰라요.

(자살할 때의)이때의 그는 자기 자신이 영혼을 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고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겁니다.

어떤 것이 중요한지 같이 판단을 해야 돼요.

생활에서 오고 가고 있는 그런 정보 매체가 중요한 것인지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인지 가치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런 그 매체 앞에서 그냥 쩔쩔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참고 기다릴 줄 모르고 모든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

이것은 영혼을 영혼을 영혼을 지닌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닙니다.

생활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낯 생활의 도구에 존속 되어 가지고 본질적인 삶을 잃어버린 거죠.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요즘의 세태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사람 답게 살려면 안으로 귀 기울일 줄 알아야 돼요.

바깥 현상에만 팔리지 말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 거듭 거듭 물을 수 있어야 돼요.

친구와 살뜰한 우정을 지속하려면 한동안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아무리 정다운 사이라 할지라도 늘 한테 엉켜 지내면 이내 시들해지고 지겨워 집니다.

우리가 늘 겪는 일 아닙니까?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좋은 친구란 만날 때마다 서로의 우정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은 친구는 내 자신은 어제 내가 아니라니까요. 어제의 그 친구가 아닙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예요.

오늘의 친구는 새로운 친구라고.

중고품이 아닙니다.

새로운 우정이 시작돼야 됩니다.

그래야 만남의 의미가 있죠.

좋은 친구란 만날 때마다 서로의 우정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만남의 의미와 함께 서로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만약 제가 날마다 이 자리 와서 이렇게 떠들어 버린다고 한번 가정해 보세요.

누가 여기 나오겠어요.

가끔 잊어버릴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오는 거지.

넘치는 것은 모자란 만 못하다는 지혜로운 명언이 있습니다.

옛 우리 명언들이 넘치는 것은 모자는 것만 못하다는 거예요.

 

때로는 삶의 여백이 필요해요

우리에게는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이 필요해요.

뭐든지 꽉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포만한 상태는 그건 죽음의 상태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어떤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 같은 것이 필요해요.

그리움이 고인 다음에 친구를 만나야 그 우정이 더욱 살뜰해집니다.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가 다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아는 과다한 정보는 공해라는 말을 깊이 새게 두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식자우환.

문명의 연장을 알맞게 활용할 줄 알면은 그것은 이로워요.

왜냐면 우리가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연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기구이기 때문에 그래요. 알맞게 활용할 줄 알면 그것은 이로운 거예요. 그건 문명 이기에요.

그러나 거기에 너무 매달리거나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해에요 그 문명 흉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돼요.

현대 우리들에 그 덕이 모자라요.

적당히 자제할 줄을 알아야 되는데 자제할 줄을 모른다니까요.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는 삶

얼굴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업의 모습이에요.

업의 꼬리라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그 얼굴로 들어냅니다.

그 인생의 이력서에요. 

예뻐지려면 비싼 돈 들어가면서 째고 꼬맬게 아니라 먼저 예쁜 짓을 해야 돼요.

또 얼굴에 무슨 표준형이 있습니까?

아름다움에 무슨 표준형이 있어요?

저마다 자기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자기 얼굴 가지고 살면 돼요.

누구와 비교합니까?

이게 우리가 뒤늦게 무슨 탤런트가 될 거예요?

배우가 될 거예요?

그 사람이 덕스럽게 살면 덕스러운 얼굴이 돼요.

착하게 살면 착한 얼굴이 된다고.

성형 수술을 좋아하지 마세요.

어떤 할머니는 성형 수술을 많이 해 가지고 밤에 잘 때도 눈을 감지 못하고 눈을 뜨고 잔다고. (웃)

눈을 뜨고.

큰일. 곁에 자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잠을 못자.

같이 못 자는데.

전부다 자기 모습을 지내야 돼요.

남을 닮으려고 하지 마세요.

예쁜 짓을 하면은 그것이 이제 축적되면 예쁘게 겉으로 드러난다니까요.

 

업의 파장에 관하여

모방 범죄라 말이 있습니다.

모방 범죄.

어떤 유행의 범죄가 발생하면 이와 같은 모방을 해 가지고 꼭 그와 같이 재현하는 일이 뭐 흔하다고.

아파트 이제 가스 배관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니까 계속해서 그런 일이 있잖아요.

그것은 범죄만이 아닙니다.

자살도 그래요.

꼭 모방을 한다니까요.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명심해서 들으세요.

우리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들 의식의 필름처럼 지켜요.

우리가 어린 에 저질렀던 일 같은 거 좋은 일이 언자 불쑥불쑥 어느때게 다시 떠오른다고요.

까맣게 잊어버렸을 잊어버렸던 일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단 경험한 일들은 필름처럼 내장 되는 거예요.

잠재 의식을 이룹니다.

이 잠재 의식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그대로 현실적으로 제현을 해요.

이게 업의 파장.

카르마의 파장이에요.

불교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론에서는 이을 아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 마음의 구조

인간의 마음의 구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눠요.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맞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것.

이것을 전 5식이라고 그래요. 이건 감수 작용입니다.

감수 작용.

이걸 전 5식.

그 다음에 제 6식 이거 의식하는 거예요.

이거는 분별작용이에요.

가령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등을 보고도 무심이 지나가는 수가 있다고.

눈은 뻔히 떠 있는데 딴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눈이 분별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제6 의식 의식이 분별 작용을 해요.

눈은 뻔히 떠 있는데 또 어디에 집중하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듣지 못해요.

그 다음에 제 7식 말라 의식이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본분이 자시라 그럽니다.

뭐 서양 사람들 이걸 에고라고 그래요.

에고라고 제 7식 자기를 지키는 본능이에요.

제 8식 이걸 아뢰아식.

이것을 이제에 장식.

갈무리할 장자. 장식.

혹은 종자식. 씨앗, 종자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 활동에 어떤 근원이 돼요.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이제 뭐 카드 빚에 쪼들렸던지 무슨 복잡한 일 때문에 자살을 하려고 낭떨어지에 서 있어요.

낭떨어지에 서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굴러 온다고 돌이 큰 바위가 굴러 오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피해요.

죽으러 간 사람이 돌에 맞아 줄건 물에 떨어줄 건 똑같을 텐데 왜 본능적으로 피하느냐 이거예요.

이건 제 7식 자기를 자기를 지키는 그런 본능, 자아 의식이 작용해 그런다는 거예요.

인간 생활이 근원이라는게 종자식 그러니까 우리가 일단 경험한 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단 내장됩니다.

필름이 찍힌다고 이거 종자식이라고 그래요.

종자식이 씨앗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씨앗이 다음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라고요.

이게 제 8식 입니다.

종자식 제 8식이에요.

다음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그런 원인체 입니다.

이 제 8식 씨앗이.

우리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했던 것이 내장된 그것이 그래요.

이 씨앗이 어떤 상황이 흐르면은 현실적으로 싹이 트고 움이 트고 활짝 열린다고요.

인도 옛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심리 분석을 네 가지로 그렇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건 그때 그치지 않고 이건 일단 우리 기억에 내장 된다는 거예요.

업이 된다는 겁니다. 또 이런 걸 자꾸 되풀이하면 이것이 훈습.

훈습.

마치 그 안개 속에서 어수 젖듯이 어떤 향기 속에서 어수 젖듯이 이걸 훈습이라고 그래요.

훈습.

훈습 하게 되면 업장이 두터워져요.

업장이 두터워져 가지고 자기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된다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

모든 것이 넘치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자주적인 삶을 이루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합니다.

자기 관리가 필요해요.

자기 자신이 자기를 관리해야 돼요.

남이 한다고 해서 덩달아 따르지 말고 자기 의지대로 살 줄 알아야 돼요.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둬야 될 것인가 내가 이런 일을 해서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

그게 답이에요.

 

어떤 순간에 속지 마세요

어떤 순간에 속지 마세요.

우리가 순간 순간 살지만은 어떤 순간에 속지 마시라고.

우리는 이 풍진 세상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너무나 많은 소리를 듣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말을 너무 많이 풀어놓고 삽니다.

저 자신부터가 그래요.

또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갑자기 무슨 뭐 노후 대책이 어떻고 뭐 이런 소리에 겁들 먹어 가지고 근심 걱정을 미리 가불해서 쓰느라고 밤잠을 못 자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냥 너무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지고.

그럼 기상 인간으로서 기상을 진즉에 못해요.

내가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실려서 떠 내려가는 표류하는 그런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돼요.

본질적인 삶이란 뭔가 한마디로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 수 있어야 됩니다.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 수 있어야 돼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꼭 할 말 만을 그것도 아껴 가면서 적게 하고 시시한 생각을 제쳐두고 어떤 삶의 본질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고 자기 자신다운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찬란한 봄 날에 다들 꽃처럼 활짝 열리십시오.

이만 마치겠습니다.


 

인사말

어 그동안 평안들 하셨습니까? 네

어 지금 산하 대지에 초록이 물들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무수한 생명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쳐내는 이 눈부신 봄날.

여러분과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몹시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은 이는 하나의 기적이고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세상에서 생명처럼 존귀한 것은 또 없습니다.

생명은 개체로 보면은 단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친지들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것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이와 같은 생명의 존엄성이 크게 손상되고 있습니다.

걸핏 하면은 어린 생명들 유괴 해다가 폭행을 가하고 살해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무작위로 살해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농경 사회에서는 감히 생각도 해볼 수 없던 그런 끔찍한 일들입니다.

씨를 뿌려서 새움이 돋고 또 어린 싹들이 자라는 그런 그 과정을 지켜 지켜보면서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의 소중함이 같이 함께 움틉니다.

어 이렇게 살다가 흙을 멀리하고 어 도시에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에서 살다 보니까 사람들이 너무 매말라 가지고.

인간의 설 자리를 그렇게 잃게 된 겁니다. 

옛날보다 소득은 훨씬 많고 가전 제품도 많고 편리하게 살고 있지만은 인성은 우리가 어렵게 살던 그 시절에 비해서 훨씬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같은 사람을 죽인다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아닙니까?

이 육신은 흉기로 살해할 수 있지만은 생명의 근원인 영혼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죽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을 죽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어울려 함께 삽니다.

기능과 조화로서 생명의 연결 고리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 근래에 와서 이 땅의 생태계가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방방곡곡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습니다.

허물고 파헤쳐져 우리 국토가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고 있는 그런 현실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 사업으로 은밀히 추진 되고 있는 한반도 대 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인 처를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끔찍한 재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가장 중요한 지금 사안이기 때문에 어 제가 오늘이 한반도 대운하 문제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거론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국토는 한두 사람의 생각으로 허물고 파괴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정치 권력을 가지고도 이 땅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 국토는 오랜 역사 속에서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온 우리의 영혼이고 살이고 뼈입니다.

그리고 우리만 살다 갈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까지 물려줄 신성한 땅입니다.

이런 땅에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 국토에 대한 무례이고 모독임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이 땅은 무기물 밭이나 흙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생명체들이 함께 이 땅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는 물류와 관광에 위해서라고 합니다.

몇 프로의 경제 논리에 의해서 이 신성한 땅을 유린하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하고 망년 된 생각입니다.

물류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이에요.

관광 눈으로 보고 먹고 마시고 뭐 즐기는 그런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위해서 그렇게 거창한 운하 계획을 세운 겁니다. 삼면이 바다이고 고속 철도와 고속도로가 수송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로 미루어 그것은 결코 타당한 구상이 아닙니다.

서울 부산 사이 그 넓은 바닷길도 실제로 운항 해원 회사가 정부의 보조를 받고도 타산이 맞지 않아 문을 닫았는데 수많은 댐을 만들고 다리를 허물고 산에 터널을 뚫어야 하는 운하가 무슨 경제성이 있겠습니까?

 

운하는 사양 사업, 철도망을 구축하는 것이 추세

그리고 운하는 지금 세계적으로 사양 산업입니다.

미국이고 유럽이고 운하는 이제 물류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도에 의존하기 위해서 철도망을 증설하고 있는 것이 지금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어 한반도 대운하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기 운하를 교통 수단으로 이용해 보겠다는 사람들은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은 개발 사업으로 땅값이 오르는 것에 관심이 있는 땅 투기꾼들입니다.

벌써부터 운화 예정지의 땅값이 지금 치솟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건설공사의 관심이 있는 일부 건설 업자들뿐입니다.

국민들 대다수는 지금 이 일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어요.

강은 살아있는 강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구비 구비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합니다.

이런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채워 놓고 강변에 콘크리트를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강이 아닙니다.

그리고 갈수록 빈번해지는 국지성 호우는 토막난 각 수로의 범람을 일으켜 홍수의 피해를 가중시킬 것이 아주 뻔합니다.

그 좋은 예로 어 1920년대 미국 플로리다 운하가 완공되자마자 홍수가 범람하여 2천여명이 떼죽음을 당한 그런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운하의 어떤 어 위험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운하는 물을 항상 채워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호우로 범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운하가 가뭄을 막아준다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운하는 항상 수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빼내 쓸 수 있는 물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공약 사업 홍보물 그림으로 순진한 지역 주민들이 속아서 엉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발 욕구에 불을 붙여 공론을 분열 시키는 이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 입니다.

문경이나 상주가 마치 부산 같은 항구 도시로 발전할 거라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도 비열한 속임수입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기간 수도권 일부에서 뉴타운 뭐 재개발이죠.

뉴타운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주민들을 속여서 근소한 표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도 국민을 기만하는 비열한 처사입니다.

청계천과 문화는 그 틀이 천지 다릅니다.

청계천은 기왕에 있었던 개천을 복원한 것이고 한반도 대운하는 멀쩡한 우리 국토를 허물고 파헤치고 토막 내어 만들겠다는 지극히 반 자연적인 무모한 계획입니다.

또 운하를 이용해서 관광을 내세우는 것도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관광객들로부터 점점 어 발길이 뜸해지고 있는 것은 운하가 없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불친절과 물가고(物價高)와 언어의 소통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관광 자원으로 제주도만 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주도에 가면 음식값을 비로서 물가가 너무 비싸요.

또 언어가 제대로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언어가 제대로 소통이 안 되고 불친절하기 때문에 다시 찾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들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하를 통해 관광을 내세우는 것도 이건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이게 다 속임수에요.

있는 기왕에 있는 관광 자원도 다 활용 못하면서 또 운하를 만들어서 관광 자원으로 개발한다는 말이 안 됩니다.

일찍이 없었던 이런 무모한 국책 사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입니다.

또 국토해양부 관계 기관에서는 뭐 내년 4월에 착공해 가지고 대통령 임기 안에 이게 마무리 짓겠되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 그 국책 사업을 그런 그 발상 자체.

그런 졸속한 생각 자체가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진행되는 것을 우리가 지켜 보고만 있다면은.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 시대에 이런 그 무모한 일이 우리 곁에서 진행된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면은 우리는 이 정권과 함께 우리 국토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무모한 한반도 대운하 패악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 오진을 비롯해서 양식이 있는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뭐 현직 국회 이번 당선 국회의원들 자신도 여론 조사해 보면은 3분 이상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모한 구상과 계획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전에 우리가 나서서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한 우리의 의무예요.

그래서이 땅에서 살다 가신 우리 조상들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현재의 우리가 돼야 합니다.

이 한반도 대운하 문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사안 임을 여러분 깊이깊이 명심하기 바랍니다.

제가 부품을 수리하면서 느낀 소감을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살만큼 살면 늦지 않아요.

 

때가 되면 다 죽어요.

때가 되면 다 죽어요.

영원히 사는 사람 없습니다.

에 크게 앓고 나니까 세삼스럽게 둘레의 모든 사람들이 고마워요.

또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 모든 사물들이 세삼스럽게에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죽을 병이 아니면은 앓을 만큼 앓으면 나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치료하면서 어 구토가 헛구역질이 나와가 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요.

50 거의 50일 동안 단식 상태였습니다.

그 제 몸을 본 모 이웃에서 간호한 사람들이 마치 부처님 6년 6년 고행한 그런 그 갈비만 앙상히 남은 그런 그 모습이라고.

그때 제 체중이 한 50kg 미만이었어요.

뭐 어 옛날 다 회복되는데 제가 앓으면서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날 그날 하루하루 즐겁게 살자 내일은 기약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이제 만나서 어 눈부신 봄날 이렇게 마주 앉아서 오랜만에 이제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러지만 내일 일을 누가 합니까?

그날 하루하루 살아야 돼. 할수 있어야 됩니다.

하루하루 잘 살아야 돼요.

후회 없이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돼요.

우리가 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어 문제가 많은 것이 인간 관계 아닙니까?

가족관의 관계, 친지들과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늘 관계가 문제예요.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실제 잘 안 됩니다.

내 마음을 내가 활짝 열을 수 있어야 되는데 말은 쉽지만 그렇게 안 돼요.

이런 그 어 극복하기 어려운 때마다 내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하직할거다.

혹은 내일 내가 이세상을 하직 할지 모른다.

지금 살아 있는 이때 내가 나를 비워야 된다.

이유가 이 매듭을 풀려야 된다.

이런 그 생각을 철저히 가져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은 저절로 어 마음의 메아리가 상대방에게 전달돼 가지고 그쪽에서도 풀려요.

이 우리가 바쁜 날 이 좋은 날 이렇게 절에 와서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세상을 보다 어 지혜롭고 또 너그럽게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어요.

이 세상을 잘 살고 못 사느냐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흔히 절해서 이제 마음을 찾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 참선할 때 염불할 때 마음을 찾아라!

눈에 보여야 마음을 찾지요.

지식이 관념적인 소리입니다.

마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돼요.

용심(用心)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쓸 줄 알 때 내 마음이 열려요.

온전하게 쓸 줄 알면 내 마음이 열리고 잘못 쓰면은 겹겹으로 닫힙니다.

순간 순간 하루하루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산다면은 둘레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나를 반깁니다.

또 나를 받아들입니다.

또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사바 세계를 살아가는데 어려운 일은 없는 사람들 어디 있습니까?

어려운 일이 없는 집안이 어디 있습니까?

어려운 일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피하려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받아들여야 돼요.

제가 이제 앓으면서 속으로 느낀 것이

‘왜 내가 이 나이에 지금 잘 와서 이때 와서 이렇게 이제에 중병에 걸려 가지고 어 이렇게 치료를 해야 되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게 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남이 앓는데 나만 앓지 않다고 하면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오만해요?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 다 앓게 마련이라고.

생로병사(生老病死)잖아요.

‘좋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인간적으로나 수행자로서 보다 성숙해지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투병을 하니까 어 마음에 여유가 생겨요.

모든 것을 그대로 이제 내가 받아들이겠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뭐 달마스님, 달마스님 법문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제가 몇 번씩 법문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 들이다 가도 온 생을 다 받아 들이다가도 받아 들이다 가도 온 생을 다 용납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한번 뒤틀리면 온결에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우리 본심 본 마음이고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옹색한 것은 뒤틀린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에요.

그런 경우 빨리 비워야 돼요.

옹색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내가 내 내가 아닙니다.

빨리 그건 비워야 돼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비워야 됩니다.

이와 같이 일상 생활에 마음쓰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혹은 독경하는 것도 내가 내 마음을 바르게 온전하게 쓰기 위해서 한 것 아닙니까?

그런 정진을 통해서 내가 내 마음을 바르게 활짝 열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밖에 다른 공덕 따지지 마십시오.

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인생이 학교예요.

배움입니다.

어제 몰랐던 것은 오늘 배우게 돼요.

그러면서 거기서 어떤 삶의 어떤 묘미 같은 걸 어 스스로 터득 하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지금 이렇게 순간순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순간순간을 재정신 차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잘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한반도 대운하 문제 깊이 깊이 명심하고 이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명심하기 바랍니다.

또 하루 하루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살면서 어 사는 일 자체가 즐겁고 기뻐야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웃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어 해소될 수 있어야 됩니다.

네 이만 마치겠습니다.

(청중 박수)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때가 되면 다 죽어요.” 법정 스님의 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대운하 건설이 자연파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스님의 혜안에 글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때가 되면 다 죽어요 그러니 하루하루 즐겁게 잘 살아야 합니다 [법정스님의 향기로운 법문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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